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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2018.09.15 00:22

연중 24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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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그리스도) 고백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예수님이 동행하는 제자들에게 묻는다. 사실 예수님의 질문은 제자들의 고백을 듣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 전에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은 다음의 질문을 위한 서막에 지나지 않는다. 즉 군중들의 반응보다 제자들의 고백, 증언을 듣고 싶은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보지 않고 단지 예언자로 보았다. 예레미아나 엘리야 예언자, 아니면 구약의 다른 예언자 중 한분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너희들도 주위 사람들처럼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의도가 엿보인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여도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어도 여전히 메시아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믿는 메시아는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구해줄 강력한 힘을 가진 혁명가로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설교에는 권위는 있었으나 군중을 사로잡을 강력한 힘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랍비, 선생님이나 예언자자로 보았다.

   유대인들은 선입견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가까이 있는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아마 잠시의 침묵이 흘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의 말을 전했던 제자들은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침묵을 깬 이가 베드로이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아마 우리도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정답을 배웠다. 마치 시험을 앞두고 모범답안지를 외우듯이 그렇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신앙고백이 아니다.

 

  오래 전 미국의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누구를 가장 존경하는지 설문조사를 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링컨, 슈바이처, 간디, 마틴 루터 킹, 소크라테스 등을 적었고 예수님의 이름은 이러한 분들의 이름 뒤에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사람들 중 많은 분들은 예수님 영향을 받아 훌륭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문 응답자 중 많은 학생들이 크리스천들이었는데도 이런 대답이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사랑과 진리를 실천하시고 가르치신 분이라고 교리로 배웠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 학생들의 마음에서는 깨닫고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에 따르면 남아프리카 학창시절에 그는 성경 특히 산상설교(마태 5)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정신이야 말로 수세기에 걸쳐 인도를 괴롭혀온 카스트제도에 대한 답이라고 확신하고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그는 미사에 참석해서 강론을 들으려고 어느 성당에 갔다가 입구에서 제지당했습니다. 문지기는 그에게 미사에 참석하고 싶으면 흑인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성당으로 가라고 점잖게 말해주었다. 그는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예수를 사랑하지만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않는 그리스도교는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이다.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들을 중간에 남겨 놓은 채 쌍방은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북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 나갔다. 남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병사가 목숨을 걸고 남군,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광경을 보고 사격은 중단되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다.

   이때 한 남군 장교가 이 북군 병사에게 물었다. “What is your name?” 그러나 그가 대답했다. “My name is Christian!”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이름이었다.

 

    우리의 이름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누구라고 부르는가? 바로 크리스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누구도 아닌 예수님을 구세주로,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어 고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부처님을, 마호멧을, 공자나 맹자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한다. 또한 그분의 삶인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가톨릭 신앙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공통되다. 그리고 세상에서 드려지는 종교적 제사는 모두 복을 더 많이 받기 위한인간의 욕구로 채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가톨릭신앙은 독특하기 이를 데 없다. 우선 인간이 아닌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셨다는 점에서 타 종교와 뚜렷이 차별화된다.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처지를 가엾이 여기신 하느님께서 먼저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다는 점에서 너무도 판이하다. 신이 스스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고 죽임을 당하는 일은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하느님이시기에 가능한, 하느님만의 생각이며 방법이다.

 

 

시련과 고통을 이긴 행복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쥐들이 포만감을 느끼는 양은 하루 평균 100Kcal라고 한다. 그래서 두 그룹으로 쥐들을 분류해서 첫째 그룹의 쥐에게는 포만감을 느끼는 양을 주고 환경도 깨끗하게 꾸몄다. 그리고 두 번째 그룹의 쥐들에게는 포만감을 느낄 수 없는 85Kcal 정도의 먹이만을 주었다.

   이렇게 키운 쥐들에게 얼마 후 암을 유발시키는 화학물질을 주사하였고 한다. 그런데 첫 번째 그룹에서는 65%의 암 발병률이 나타났고, 두 번째 그룹에는 단 4%만이 발병한 것이다. 바로 포만감이 병원균과 싸워 이기게 하는 T임파구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행복은 고통과 시련이 없이 다른 모든 것으로 채워질 때 가능한가?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부족하고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을 때 더욱 더 건강해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닭과 독수리는 위험 앞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폭풍이 몰려오면 닭은 몸을 날개에 묻은 채 숨을 곳을 찾는다. 그러나 독수리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편다. 그리고 태풍에 몸을 싣고 유유히 날아올라 안전지대로 향한다.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사람도 두 유형으로 나뉜다. 고통스러운 일, 억울한 일, 괴로운 일이 닥치면 몸을 숨기는 닭형 인간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담대하게 대처하는 독수리형 인간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항상 독수리형 인간이다. 시련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식의 인생여정에는 고난의 가시밭길이 그치질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담대하게 고통을 극복한 사람들에 의해 다시 쓰여졌다. 서양 속담에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사나운 바람으로 인해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전했다. 모진 바람과 추위를 이겨내며 자란 나무는 좋은 목재가 된다. 믿음은 우리를 나약한 닭에서 강한 독수리로 바꾸어놓는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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